나는 이제 내 미지근한 이십대가 좋아질 것도 같습니다.
나의 이십대(GV) 3월 26일 오전 4시 44분 F열 44번석
항상 세상을 85도 정도 비뚤게 보고 있는 것 같은 투덜거림이 매력같은 친구가, 얼마 전에 어떤 글을 한껏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철학글은, 연애편지처럼 써야 하는 거라고요. 누가 읽어도 이해할 수 있게 써야 한다고요. 걔의 프로필 사진은 걔가 사랑하는-그리고 저도 사랑하고 있는- 누구의 얼굴이었는데, 나는 저런 냉혈한이 쓰는 연애편지를 언젠가는 꼭 빼앗아 읽어보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연애편지 쓸 상대가 없어서 영원히 철학글을 못쓰겠네, 라고 했습니다. 참, 철학 좀 해보려니까 사랑까지 하라니,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네요. 지금은 딱히 상대가 없으니, 이렇게 여러분을 상대로라도 연습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내 이십대를 말 건네듯 설명하자니, 어떤 청춘소설의 시작처럼 ㅡ 저는 < 인간실격 >이야 말로 청춘 소설이라 생각합니다ㅡ ,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라고 운을 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불우한 유년, 방탕한 젊음, 좌절된 사랑, 결국 상실... 로 이어지는 삶,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준비된 게 없네요. 저는 미지근한 이십대를 살았습니다. 스무 살에는 국문학도였습니다. 하지만 시도 소설도 별로 읽지 않았어요. < 까칠한 상사가 내 정략결혼남?! > 뭐 이런 비슷한 제목의 웹소설은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다니던 학교에는 영어권 교수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상주해 있는 공간 같은 게 있었는데, 나는 주로 전공 수업을 빼먹고 한번도 못가볼 나라의 언어를 중얼거리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리얼리즘이니 아포리즘이니 주절대는 전공 강의나, 맑은 얼굴로 어른 흉내를 내야 '인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스무살의 술자리보다는, 나를 아시안 소녀 정도로만 보는, 매번 가도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오만한 백인 교수들과의 대화가 더 좋았어요. 미지근한 제 삶이 특별해진건 내게 찾아온 병이었습니다. 병은 징후도 조짐도 없이 왔습니다. 나는 어느 날 밤에 문득 침대 발치 창문 저기 아래에서, 사랑하는 이와 몸을 던진 소설가의 부서진 몸이 나를 부르는 걸 들었습니다.
내 미지근한 삶은 그날로 특별해졌지만, 또 내 미지근한 삶은 그날로 내 수치가 되었습니다. 나는 나의 우울이야말로 나를 특별하게 만든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 우울은 내 영감이 되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은 나의 우울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아왔던 미지근한 삶이 수치스러워졌습니다. 나에게는 더 많은 고난이 필요했습니다. 나는 나의 불행한 삶을 서사할 불행이 없다는 게 슬펐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미지근한 삶을 불행으로 삼았습니다.
스물 한 살에는 철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전공 수업에서 배운 것은 역시나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친구들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나는 사실, 서울로 가려고 했습니다. 서울에 가면, 내가 상상하는 청춘소설같이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가난하고 내게 무심한 예술가를 만나 사랑같은 걸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올해 저는 스물 두 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생일은 11월이니까, 저는 이제야 만으로 이십세가 되었어요.그렇게 치자니 나는 아직 이십대가 된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올해 초에 과방에서 낡은 잡지를 찾았습니다. 누런 표지에 < 새벽의 사람 >이라고 적혀있었지요. 거기엔 1989년에 내 또래였을 철학도들의 글이 있었습니다. 있죠,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89년, 이 책을 만들때 쯤 그들도 자신의 삶이 퍽 미지근하다 여기지 않았을까요? 87년에 전두환이 항복하고 2년째 되던 그 해에, 함성은 사라지고, 시대를 위해 몸을 던진 선배들은 재가 되고, 단결도 투쟁도 없는 캠퍼스에서 그들은, 영문도 모른채 다시 대학생이 되어서, 선배들의 무덤 앞에서 자신의 삶을 미지근하다 여겼을까요? 이런 말을 들으면 무례하다 발끈 화를 낼까요? 저는 이제는 운동도, 유토피아를 바라는 천진한 마음도, 맑스를 읽는 사람들도 모두 사라진 캠퍼스에서, 2021년의 철학도들이 미지근하게 기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상한 욕심을 느꼈습니다.우리는 지금, 여기에, 살아있는데요. 그래서 내가 여전히 미지근한 이십대를 살고 있을지언정, 그리고 당신이 스스로의 삶을 미지근하다 생각할지언정, 우리의 미지근한 삶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껏 미지근하게 살아와서, 뜨거운 사람을 만나면 그 뜨거움에 잡아 먹혀버리기도 했고, 차가운 마음을 맞대면 나 또한 차가워지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미지근한 사람들끼리는 언제든 꼭 안아버려도 차가움에 놀라거나 뜨거움에 답답해 할 필요가 없어요. 미지근한 사람들끼리는 살을 맞대면, 온전한 각자의 체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하죠? 이렇게 쓰다보니, 나는 이제 내 미지근한 이십대가 좋아질 것도 같습니다.
고시텔 여자들
나는 시험기간마다 이곳으로 돌아온다, 여자 고시텔.
지난 기말기간에 나는 409호 여자, 이번에는 410호 여자가 되었다.
여기는 여자들만 산다. 방 안에 샤워부스와 변기를 끼워 넣어서 여기는 고시원이 아니라 고시텔이다. 외창이 있는 방은 3만원이 비싸다. 나는 3만원을 더 내고 햇빛을 볼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27만원짜리 권리. 신발장에는 여러 여자들의 신발이 있다. 구두도 운동화도 슬리퍼도 있다. 좁은 복도에는 빨래가 널려 있다. 속옷이 섞이지 않게 주의해야 해. 택배는 항상 공동문 앞에 있는데, 누구는 두유를 시켜 먹고 누구는 요가 매트를 샀다. 대체 이 좁은 방에서 운동을 어떻게 하냔 말이야? 좁은 방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이 곳에는 여러 여자들의 흔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여자들의 얼굴을 본 적이 별로 없다. 다들 왜인지 부끄럼이 많아, 좁은 복도에서 마주치면 방으로 얼른 숨기 바쁘다. 하지만 여자 고시텔의 벽은 가벽, 자기만 있다고 믿고 내는 여자들의 소리. 여자들은 서로의 소리를 듣는다. 나는 410호의 좁은 침대에 누워서 -일자로 누우면 발에 샤워부스가 딱 닿는다- , 409호 여자의 기침소리를 듣는다. 콜 록 콜록 콜 록 정확히 세 번을 이어 한다. 407호인가 어디선가는 매일 전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애인과 싸우는 소리, 411호 여자는 경영학과임에 분명하다. 매일 발표를 연습하는 소리가 들린다.
새벽이면, 누군가는 변기통을 붙잡고 토하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는 우는 것도 같다. 그런데 나는 이 부끄럼 많은 여자들의 얼굴을 본 적이 별로 없어서, 가벽 너머 그 얼굴이 때로 친구같았다 언니 같았다가, 끝내 내 얼굴같기도 하다. 내가 409호에 살 때 410호 여자는 매일 울었다. 나는 이제 410호 여자가 되어서, 마치 이것을 어떤 평행처럼 느끼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409호 여자였을 때 벽에 가만히 귀를 대고 들었던 울음소리는, 지금 내가 내는 소리였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내가 지금 듣는 409호 여자의 기침은 청춘같은 것을 기침하던 과거 나의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시간의 틈새가 벌어진 어딘가에서 부유하는 것처럼 느끼면서 - 사실 이건 아까 베이스먼트에서 진창 마신 롱티탓임에 분명하다-, 410호 여자가 울던 침대에 누워서, 그녀가 남기고 간, 그리고 그녀 이전에 많은 여자들이 이 좁은 방에 묻히고 간 슬픔을 더듬는다.